눈이 붕어만해졌어

며칠 전 누가 말해줬다. 침대에서 책 읽는 건 안 좋은 습관이라고. 침대에서 책을 읽거나 잠자는 것 외의 활동을 하면 몸이 장소를 기억해서 쉽게 잠에 들지 못한다고 했다. 내가 그래서 잠을 잘 못 자나? 했다. 요즘은 그래도 침대에서 책만 읽지만 예전에는 침대에서 컴퓨터도 하고 군것질도 했고 심지어 공부도 했었다. 잠드는게 걸리는 시간이 꽤 긴 편인데 운동을 하면서 그 시간이 조금은 짧아졌다.

각설이 길었다. 어제도 침대에서 자기 전에 책을 읽었다. 난 이 시간을 아주 좋아한다. 침대를 고를 때 머리맡에 기댈 수 있게 아무런 장식이나 받침이 없는 걸 골랐다. 그래서 내 침대 머리맡 주변에는 늘 2-3권의 책과 잡지들이 놓여있다. 하지만 기대는 건 중요한 거니까 나중에 내 방이 생기면 침대 머리맡 옆에 조그만 서랍장을 놓아두고 싶다.
침대 머리맡에 기대고 앉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었다. 그냥 조금 읽다가 잘 생각이었다. 그런데 새벽 네시까지 다 읽어버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내 눈은 위만 부은게 아니라 눈 아래까지 부었다. 밤에 읽으면서 티셔츠 소매부분이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서 결국 곽티슈를 옆에다 놓고 읽었다.

읽으면서 이혜경의 <길 위의 집>이 생각났다. 가족이 엄마를 잃어버린 사연. 그런데 길 위의 집 마지막 부분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프롤로그는 한 줄 한 줄 생각이 났는데, 길 위의 집에서의 엄마는 마지막에 찾았던가? 찾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전화를 받고 엄마를 데리러 간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신경숙의 소설에서 엄마는 죽었다. 귀신이 되어서 이 집 저 집을 찾아 다니고, 소설 속의 '너'는 끝내 엄마를 찾지 못한 채 바티칸에 있는 피에타 상 앞에서 구원을 받는다.
소설의 두번째 문장에 '너'가 나왔을 때 그 이질적인 호칭에 깜짝 놀랐다. 며칠전 현대불소설 수업에서 최선생님이 vous로 시작하는 소설이 20세기 중반에 처음 나왔다는 얘기를 하면서 그 작가와 작품 얘기도 언급하신게 희미하게 생각이 났다.

내 엄마, 내 할머니, 내 가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나라의 가족도 이런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가족은 구질구질한 구석이 있다. 그 구질구질함이 끈질기게 평생을 옭아매어서 많은 소설에 그토록 숱한 소재들을 제공하는 지도 모르겠다. 하루키가 그 당시에 각광을 받았던 건 정말 가족에게서 자유로운 그의 인물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친구 엄마 소원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우리 엄마의 소원은 뭐였을지 궁금했다. 물어봤다. 엄마는 너희 셋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거라고 했다. 내 나이보다 더 오래 한 직장을 다니면서 지금은 그럴듯한 자리까지 승진한 엄마다. 아반떼XD를 타고 다니면서 엄마 정도 직책에 남들 보기가 그래서 조금 더 큰 차를 사고 싶어하는 우리 엄마. 그런 거 말고 엄마 소원은 없냐고 했더니 엄마는 그냥 소리없이 웃었다. 그런건 왜 물어보냐고.
신경숙의 소설이 말했다. 엄마도 걸음마를 처음 뗀 시간이 있었고, 세 살이었던 적이 있었고, 소녀 시절, 학생 시절이 있었다고. 얼마 전 엄마 아빠의 연애 시절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내 나이에 이미 내가 있었던 우리 엄마. 그런 우리 엄마도 아빠와 연애를 했고, 고민을 했고, 결혼을 했다.

엄마가 겨울부터 4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시간을 비워놓으라 했다. 같이 충주에 가자고. 단양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험기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봐서,라고 대답했다. 시험기간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목요일에 시험이 끝났다. 토요일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난 패러글라이딩이 타러 가고 싶었다. 토요일이 아니면 가기 힘들고 5월은 결혼식 등이 많아서 토요일에 쉽게 시간이 나지 않았다. 엄마에게 패러글라이딩을 타러 가겠다고 했다. 엄마가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충주인지 단양인지를 다음주 토요일에 새벽6시에 잠실역인가까지 가서 단체버스를 타고 가게 되었다.
다음주 토요일에 패러글라이딩 가는 것보다 엄마랑 그 지방도시를 가는 걸 더 행복하게 여기기로 했다. 아니, 행복하게 여겨만졌다.
세상의 모든 딸년들은 못됐다. 나는 못돼쳐먹었다.

엄마는 아직 잔다. 교회 가기 전에 엄마한테 너무너무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가야겠다.

by 아애 | 2010/04/18 09:48 | brouillon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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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다죵 at 2010/04/18 21:49
아이고 이쁜이
Commented by 김작가 at 2010/04/19 04:35
나 아직 <길 위의 집> 안읽었는뎅! 아껴두고 있다고..-_-;;
그나저나 '행복하게 여겨만졌다' 뭘 만졌다는ㅈ ..ㅋㅋㅋ
뭔가 한참 낯설어
Commented by 아애 at 2010/04/19 11:40
엄마 찾고 안 찾고가 중요한게 아니니까 스포일러 아님 ㅋㅋ
한국어 텍스트 아껴두는 그 마음은 어쩐지 알 것 같네요 ㅋㅋㅋ
Commented by ㄱㄴㅍ at 2010/04/24 17:19
안읽었지만 뭐 아들놈들도 그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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