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가진 힘 : 심윤경, <사랑이 채우다>
  심윤경의 <사랑이 채우다>는 <사랑이 달리다>의 속편으로 같은 인물들이 <사랑이 달리다> 이후의 어떤 삶의 궤도에 올랐는지를 그리고 있다. 심윤경의 데뷔작인 <나의 아름다운 정원> 이후로 작가의 작품들은 늘 기대하는 마음으로 보는데, 심윤경의 작품은 두 가지 측면에서 개인적인 취향을 만족시켜준다.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한국인 특유의 가족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고, 추리소설만큼이나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사랑이 달리다>라는 제목처럼 ‘달리면서’ 읽을 수 밖에 없다. 작가 역시 <사랑이 채우다>의 작가의 말에서 <사랑이 달리다> 이후의 후속 전개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의 인물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그대로 발산하고, 작가는 단지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세계를 지켜봤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과 작품의 형식적 구조 같은 부분을 전부 차치하고서 소설 속의 인물들과 그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힘만으로도 마치 낚시에서 막 잡은 물고기 같이 펄떡펄떡거리는 작품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소설의 주인공 혜나의 사랑과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에서 무엇보다 제도권 바깥의 사랑이라는 코드에 주목했다. 서른아홉의 혜나가 소꿉친구인 성민과 결혼을 해서 십년 동안 평화와 안정 속에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가 욱연을 만남으로써 자기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과 이로 인한 순간순간의 에피소드들, 각자의 처한 상황에서 누구라도 느낄 법한 감정의 세밀한 묘사. 이 모든 것들이 작품을 시종일관 관통하는 유머와 함께 버무러져서 심윤경 특유의 문체가 독자를 사로잡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불륜과 콩가루 집안이라는 소설의 큰 줄기는 흔한 막장 드라마의 설정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작가는 이 통속적인 소재들을 가지고 오히려 서른 아홉 살 혜나의 성장소설로 만들어낸다. “사고를 칠 때는 미래 따위 생각하지도 않고, 내가 저지른 일의 당연한 결과가 닥쳐오면 그제야 기절할 듯이 놀라는 인간”이었던 혜나가 황해재단의 이사직을 탈북민인 최영해에게 넘겨줄만큼의 인간이 되기까지의 성장통을 두 편의 소설을 통해 독자들은 지켜본다. 

  혜나도 욱연도 각자의 가정이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기 때문에 서로의 사랑을 위해서는 기존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 혜나가 욱연을 사랑한 방식은 “내 사랑을 전기 에너지로 전환할 수만 있었다면 인류는 공짜로 백만 년간 불을 켰을” 정도라는 장담 속에 한눈에 드러난다. 그러나 이 인류에게 전기를 공짜로 나눠줄만한 지극한 사랑도 제도권 밖에서는 힘을 잃는 순간들을 맞이한다.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남편, 결혼, 부부, 가족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자주 언급된다는 사실을, 나는 정욱연과의 바람이 난 뒤에야 깨달았다. 일상적이고 흔해빠진 그 단어들이 너무 일상적이라서 더 아프게 가슴을 찌른다는 것도 알았다. 제도의 테두리 안에 안온하게 머문 사람들은 그 아픔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178) 

  제도권 밖에서야 비로소 혜나는 “‘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 사이에 아무런 경계가 없어지는 그런 지점”이 있다는 사실과 그 지점을 통과한 이후에 또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네 삶이 펼쳐진다는 점을 깨닫는다. 아빠와 작은오빠에게 무한정의 숭배에 가까운 사랑만 받고 자란 혜나, ‘그랜드 개꼬장’의 대명사인 혜나가 성민과 마지막으로 만난 후 욱연과 함께 지는 해를 바라보는 산성의 벤치에 앉아 나눈 대화는 그런 면에서 단연 <사랑이 채우다>의 정점에 있는 장면이다. 

  또다른 흥미로운 점은 노년층의 사랑이 어떠한 가치판단 없이 중립적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 부분이다. 혜나의 아빠 김덕만 사장은 큰 아들보다 더 어린 여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고, 혜나의 엄마인 임현명 여사는 이미 끝난 사랑에 대해 위자료 따위 필요없다며 ‘쿨하게’김덕만 사장과 헤어지고, 이후 여든 줄에 접어든 박 회장이라는 새로운 남자를 만난다. 이후 일요일이면 교회를 가네 마네 하며 툭탁대는 이들의 관계마저도 작가는 혜나와 욱연의 관계 못지 않게 사랑스럽고 정직한 시선으로 마주한다. 일흔이 되고 여든이 되도 여전히 사랑하고 싸우고 살아간다. 이들의 사랑도 전지구에 전기에너지를 공급하고도 남을 혜나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심윤경의 소설을 읽다보면 소설은 무엇보다도 인물들이 꾸려가는 이야기 그 자체, 혹은 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난 이후에도 혜나와 욱연이 어느 시공간에서 사랑하며 살기를, 혹 그들의 관계가 어떠한 이유로 끝난다 하더라도 그 다음 삶을 또 살아가기를 바라게 된다. 일흔에도, 여든에도, 아흔에도 그들의 삶에 사랑이 있기를. 

by 아애 | 2015/03/02 19:25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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